조만국경(朝滿國境)

배성동 시민/소설가 / 기사승인 : 2021-07-28 00: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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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 망명 보고서(15)

▲ ⓒ문정훈 화가


두만강 화룡봉을 넘어

1907년 9월 하순. 함경산맥 최북단 운무령(雲霧嶺. 526미터)에 추위가 닥쳤다. 운무령을 넘던 구름비는 찬 공기를 만나면서 싸라기눈이 되었다. 싸라기눈 발자국은 적의 눈에 띄기 쉽다. 산등 우묵한 반 평지에 판 땅굴에서 하룻밤을 보낸 별동대 대원들은 눅눅한 몸을 추슬렀다. 산악 특성상 비가 많고 습한 한랭한 기후와 오랜 너구리 생활은 백 가지 고초를 안겨주었다. 제대로 된 잠자리는 고사하고 밤이 돼도 관솔불을 켤 수 없는 올빼미 생활을 해야 했고, 적의 눈에 띌까 싶어 연기조차 피울 수 없었다. 거기다 비상식량으로 지닌 미숫가루며 강냉이 알곡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 끼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 건 보급투쟁에 나서야 한다. 


반나절 행군으로 경원 녹야(鹿野) 심심골 움막에 들어섰다. 이곳 지리에 밝은 녹야포수가 조심스럽게 움막 수색을 했다. 행여 일본군 척후병이 쳐둔 함정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 움막은 비어 있었다. 일본군경은 국경 인근의 작은 산촌에도 밀고꾼을 박아두곤 했다. 특히 산포수나 심마니들이 사용하던 임시 산막에도 첩자를 심었다. 수색 나온 척후병과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면 일본군 수비대에 비상이 걸릴 것이고, 토벌대를 동원해 저인망식으로 뒤질 것이다. 소위 쌍끌이 토벌이다. 


조‧만(朝滿) 접경이 멀지 않았다. 두만강과 인접한 함북준령 송학산에 들어선 것은 얼마 후였다. 송학산자락은 두만강과 접했고, 강을 건너면 이내 만주 수림과 연결됐다. 그래서 만주범과 아무르표범이 무시로 드나드는 길목이 되곤 했다. 별동대는 두만강 조만국경이 내려다보이는 아오지 능선에 진을 쳤다. 아오지 요새에서는 사방이 두루 관찰됐다. 은덕읍내가 오 리, 신아산 벽촌이 십 리, 그리고 두만강 너머에 있는 청국 포구와는 시오 리 거리였다. 권취문은 요새에 몸을 숨기고 사위를 두루 살폈다. 두만강을 비롯해 만주 봉금대지까지 내려다보였다. 두만강 하구를 보자 녹둔도 방면으로 간 북청산포대 대원들이 걱정됐다. 연길도 또는 동간도로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청나라에서 내린 봉금령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었지만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두만강을 감싼 회룡봉(回龍峰)이었는데, 용이 승천하는 천하 명당으로 꼽힌다. 


권취문은 지도를 꺼내 관북육진 탈북로를 꼼꼼히 기록했다. 바로 코앞에 있는 두만강 회룡포를 건너면 곧장 훈춘현(琿春縣) 경신진(敬信鎭)으로 갈 수 있었다. 남동쪽 내륙길은 풍산을 거쳐 청진 산협이었고, 특별히 볼만한 것이 없는 동남쪽 방향은 라진 비탈길이다. 서남쪽 방향에는 삼태봉과 중도, 영산, 회령이 이어졌다. 두만강 너머 청국 권하(圈河, 청국명 체허) 방천을 따라가면 노령 연추와 연결됐다. 결국 권하, 회룡봉 둘 중에서 탈북로를 선택해야 했다. 나중에 이 회룡포 탈북로는 안중근 의사의 국내진공작전 루트로도 활용된다. 이듬해인 1908년 연추의병연합부대와 합류한 동의군 우영장 안중근은 이 루트를 통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친다. 


아오지광산 금전꾼으로 위장한 녹야포수가 단독 정찰에 나섰다. 그는 노일전쟁에 참전 전력이 있는 토착포수였다. 산을 내려오다가 만난 그림자는 꿩잡이 사내였다. 그는 기럭아비처럼 잡은 꿩과 산토끼를 닭장에 넣어 등짐 졌다. 민가가 있는 동리에 들어서니 읍성이 나타났고, 마침 오늘이 장날인지 인근 장터걸에 장이 섰다.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읍성 앞에 일장기 깃발 펄럭이는 일본 헌병 분견소가 들어섰다. 두만강 너머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옴팡진 평지에 일본군 경비대가 진주해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장터걸은 한산한 편이었다. 인근에 있는 녹야, 신아산, 아오지 등지에서 나온 짐승 털가죽과 약초, 버섯 그리고 두만강 연안에서 나온 물고기가 난전에 올랐다. 장터걸 모퉁이를 돌자 장사가 안돼서인지 반 술깨나 된 장사치가 넋두리를 읊어댔다. 


”세월아 네월아 네가 가지를 말어라. 작난한 호걸이 다 늙어 간다. 에헤야 에헤야 아무리 보아도 널과 내로다 / 에헤야 에헤야 삼천리강산 넓기는 하디만 널과 내 갈 곳이 그 어디란 말가 / 강동 간 님은 돈이나 벌면 돌아오건만 북망산 간 님은 다시는 못 온다 / 해삼위 항구가 그 얼매나 좋길래 신개척 찾아서 빈 보따리로다 / 간다 간다 나는 돌아를 간다 간다 해두 아주 갈까 정은 두고 간다’ 


녹야포수는 장사치의 넋두리를 뒤로하고 두만강 둑길로 내려갔다. 월경을 감시하는 일본군 초소는 1000보 간격으로 세워졌다. 조만 세관이 있는 권하는 청국과 일본군 수비대의 경계가 삼엄한 데 비해 회룡봉 대안은 대체로 경계가 허술한 편이었다. 강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너비가 약 오륙백 보 남짓하고, 저쪽의 모래톱을 지나면 수림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신아산 하곡을 통해 도강하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만약 신아산 돌파가 무산된다면 도문 방면으로 달아나야 했다. 읍성 장터걸로 돌아온 녹야포수는 난장 앞을 지나갔다. 죽은 여우를 손에 든 꿩잡이와 마주쳤다. 


“여우 사소. 산토끼 사소. 북풍한설 견디기엔 여우 털, 토끼털만큼 좋은 건 없소. 거기다 여우 거시기는 남의 서방 홀리는 명물 아니오. 바람난 여자 가랑이 벌리는 덴 이거보다 좋은 물건 없소.”


꿩잡이 사내가 혼자 히죽거렸다.


“뭘로 잡은 거요?”


“배추 달아놓은 올무코에 걸린 놈이요.”


“맛은 어떻소?”


“토끼보다 훨씬 맛 좋소.”


눈치 빠른 꿩잡이가 흥정도 하기 전에 값을 반 토막 쳐 디밀었다.


“산토끼 한 마리에 10전씩이요. 5전씩 드릴게. 이 값이면 공짜요 공짜.” 


녹야포수는 토끼며 꿩까지 몽땅 샀다. 빈집에 소 들어온 듯이 반가워하던 꿩잡이가 머리를 꼬박꼬박 조아렸다. 물건을 산 녹야포수는 요즘에도 두만강을 월경하는 유랑민이 있느냐고 물었다. 꿩잡이 말로는 노일전쟁 이후 일본군 경비가 말도 못하게 살벌해졌고, 얼마 전에는 왜놈 총에 맞아 죽은 월경자가 물에 떠내려갔다고 겁을 줬다. 그는 이어서 두만강 물가는 오리쯤 되는데 아무 데나 건너면 급류에 휩쓸릴 수 있으니 짐승 발자국이 있는 모래섬 두레길을 따라가라고 귀띔했다. 두레길을 건너가면 청국 회룡봉이 나오고, 거기서 길림성 훈춘까지는 꼬박 이삼일은 더 걸어야 한다고 했다. 또 조선과 청국, 로씨아와 맞붙은 두만강 칼끝 방천내기는 모래바람이 부는 삭풍지대로 일렀다.
 

▲ ⓒ문정훈 화가



울고 싶기도 하고 속 시원하기도 하고


별동대 요새로 돌아온 녹야포수는 경계가 허술한 회룡봉 두레길을 탈북루트로 보고했다. 별동대들은 야밤 도강을 결행키로 했다. 쌀알 같았던 싸라기눈은 기온이 내려가자 국지성 빗방울로 굵어졌다.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던 별동대들은 폭우를 뚫고 두만강을 향해 잠행에 나섰다. 기세 좋게 퍼붓는 폭우 때문인지 일본군 국경초소는 잠잠했다. 두만강 하곡 모래밭에는 예상한 대로 짐승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범 발자국, 곰 발자국, 오소리, 사슴, 멧돼지 발자국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는 도강이 시작됐다. 물살이 빠른 여울목을 피해 강 건너 모래톱을 향해 무쇠 발을 내디뎠다. 흐르는 강물은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처음에 무릎까지 차오르던 수심은 가슴, 급기야 한 질 두 질 깊이로 깊어졌다. 무사히 청국 땅 회룡봉 두레길에 당도한 별동대 대원들은 번개처럼 수림지대로 숨어들었다. 막상 두만강을 넘어오고 보니 울고 싶기도 하고 속 시원도 했다. 


두만강 인근에 거주하던 함북 사람들이 약초나 짐승 가죽을 얻을 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청나라에서 출입을 금기시킨 봉금의 땅이었지만,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 백성들로서는 그만한 무주공산이 없었다. 아침에 강을 건너 농사를 짓고 저녁에 돌아갔고,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를 해 돌아오는 춘경추귀(春耕秋歸) 경작을 했다. 그러다가 아예 조선과 가까운 봉금지역에 정착하게 됐는데, 지금은 경신 고을에 달린 오지마을이 됐다. 


만주 수림지대에는 청국 관리는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만 불었다. 청국은 청일전쟁에 패배한 이후에는 섬나라 왜병을 저지할 소규모 경찰병력만 유지했다. 별동대는 경신 서가산 임장(林場)에서 일시 체류하며 노령 잠입 통로를 물색했다. 그러나 노일전쟁 이후 국경은 완전봉쇄돼 있었다. 노령 연추 포시에트로 가는 방천내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취문은 통역을 해줄 길 씨를 은밀히 만났다. 그는 함남 단천에서 광산노동자 출신으로 식솔을 데리고 일찍이 경신으로 이주한 산판꾼이었다. 그의 첩보에 따르면 이 일대에 주둔한 청‧노(靑露) 양국 국경수비대는 각각 100명씩이었다. 중무장한 양국 국경선을 뚫다간 개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 

 

▲ ⓒ문정훈 화가

 


별동대는 자갈길을 따라 훈춘현으로 나갔다. 우마에 소금 따위를 싣고 가는 조선 동포들과 섞여 보따리장수로 변신했다. 이들과 어울려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훈춘 변두리에 있는 조선 동포마을 역시 궁핍한 조선 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자기 토지를 소유한 조선 동포는 드물었고, 중국 지주들 토지를 삼칠(三-七)이나 십육(十-六)로 맡아 생활하는 소작농들이었다. 청인들은 흰옷에 상투머리를 한 조선인을 꺼려 했고, 심지어 머리를 깎은 사람도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만큼은 공자 왈 맹자 왈이나 지껄이는 낡은 봉건사회문화는 그대로였다. 


왈짜한 훈춘 장마당 거리에 들어서니 태평차라는 말수레들이 줄을 지었고, 객점에는 청인과 조선인들이 차고 넘쳤다. 북적이는 장마당에는 내로라하는 장돌뱅이부터 하물며 조선에서나 볼 수 있는 짚신장수, 죽물장수, 남초담배장수, 망건장수도 보였다. 대원들은 여기가 조선인지 청나라인지 했다. 상투머리를 자른 대원들은 조선 무명옷을 벗어던지고 청국 복장이나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착검한 경관 십여 명이 장마당에 들어왔다. 금테 모자를 쓰고 금 견장을 한 경관복 관리가 군도를 들고 이끌었다. 경관들이 여러 사람을 세워 행리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별동대 대원들은 서둘러 장마당을 빠져나왔다. 


가이없는 유랑길이 다시 시작됐다. 훈춘하(琿春河)를 거슬러 올라 노야령을 향해 걷고 또 걷길 사흐레, 소만국경과 인접한 마적달에 당도했다. 오던 길에 개똥망태를 짊어지고 온 약초꾼, 범 가죽조끼를 입은 포수, 객사한 아비를 따라 다니던 장마당 아이도 만났다. 훈춘하는 남북으로 뻗은 노야령과 소만국경 사이에 위치했다. 길림성 동북 등줄기인 노야령과 훈춘하 권역에는 조선인 마을이 많았다. 조선 유민은 8만 명에 이르렀고, 만주족은 2만7000명 정도였다. 


발걸음을 돌려 춘화(春化)로 내처 갔다. 춘화 역시 조선 동포들이 많이 살았다. 모처럼 조선족 벽촌에 있는 객주집 온돌방에 짐을 풀고, 뜨끈한 국밥을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권취문은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만국경 통로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춘화 동흥진촌에서 소만접경으로 이삼십 리 더 들어간 호문산(虎門山) 미뢰뫼 기슭에 분수령이라는 지름길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들리는 말로는 밀수꾼이나 첩보원들이 숨어다니는 비밀통로로, 짐승도 마다하는 층층벼랑길이라 했다. 거기다 무시로 덤벼드는 줄범과 불범, 불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일전쟁에 참전했던 녹야포수는 어딜 가도 일등포수였다. 그가 소만국경을 안내할 길잡이를 구해왔다. 노국 국적의 권두일(연해주에서는 권이반으로 개명)이라는 고려인 포수였다. 그는 두만강 이북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범 전문 사냥꾼이었는데, 마침 연해주 목허우(포시에트)에서 잡은 용골(龍骨)을 처분하기 위해 조선족 벽촌에 머물고 있었다.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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