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미의 철학 에세이] 저무는 해를 품고 다가오는 해를 마주하다

최수미 / 기사승인 : 2015-12-23 1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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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문다. 어찌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시간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매년 이맘 때면, 지나 온 시간이 풍요로워 마음이 든든해지기는커녕, 해놓은 것도 남은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헛헛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생각은 더 커지는데, 여기엔 특별한 시간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는 등 뒤로 빠르게 사라져 죽음의 시간으로 가라앉고, 우리는 앞만을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화살과 같이 날아가는 직선의 형상을 띄고 있다. 그래서 해가 지나면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고 남겨진 시간은 더욱 줄어든다는 생각에 조급해진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이미지이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런 시간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원시사회에서부터 농경사회까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삶을 꾸려왔던 인류는, 태양과 달과 별의 원운동에 따라 시간을 영원한 둥근 원으로 여겼다. 생명과 죽음 또한 서로 순환하기에 죽음에서 생명이 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이는 직선의 시간 이미지는 ‘예외적’이며, 현대세계의 독특한 특징이다.(제이 그리피스 <시계 밖의 시간>)

<모모>는 시간에 관한 동화이다. 자본가인 회색신사들은 노동자와 시민들을 상품 세계의 노예로 만들며, 이들의 시간을 착취함으로써 자신의 영생을 유지한다. 시간을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모모는 회색신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돼 안내자 거북이 카시오페아를 만나면서 시간의 근원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의 근원에 가까이 갈수록 모모의 발걸음은 늦어지고, 어느덧 멈추는 듯하더니 오히려 뒤로 가게 된다. 그럴수록 회색신사들과의 거리는 더욱 벌어진다. 결국 헉헉거리며 쫓아오던 회색신사들은 모모를 영원히 놓치게 된다.

이때의 시간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자. 과거를 마주 보며 두 팔을 벌려 서고, 미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그때 시간은 내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과거의 시간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가슴으로 품고 있다. 미래는 내가 쫓아가는 게 아니라 미래가 나에게로 다가오면서 나는 뒷걸음을 치게 된다. 내 가슴은 보름달을 가득 안은 듯 풍성해진다. 나는 살아갈수록 시간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더 많이 품게 된다. 시간이 내 삶과 분리되어 따로 달리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내 삶은 시간의 두께로 두툼해진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빠져나가 메말라 버리는 게 아니라 더 무르익어 깊어진다. 죽음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시간의 완성이 된다.

인디언 이야기다. 어머니가 딸에게 줄 옷을 뜨개질 하고 있다. 도시에서 살다 온 딸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며 그냥 돈으로 사는 게 낫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시간을 닦달하며 종종거리는 딸을 조용히 달래며 말한다.

“얘야, 시간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시간은 너와 함께 영원한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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