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미의 철학 에세이] 혼용무도(昏庸無道)한 사회에도 ‘도’를 배울 수 있는 스승은 있다

최수미 / 기사승인 : 2016-01-19 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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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쿵푸2

<호모 쿵푸스>를 읽고 중학생인 영이,호야,혁이,주야랑 수다를 떠는 자리였다. 영이가 친구들이랑 교실에서 공놀이 하다가 또 형광등을 깼다길래, “아니 왜 운동장에서 안 놀고 교실에서 공놀이 하냐? 기본 예의가 없구만!” 하자, 호야가 시니컬하게 “바깥에 나가서 놀 시간이 있어야 나가서 놀지요” 한다. “응? 그런 거야?……. 그래, 학교 공부는 재밌냐?”며 내 입에서 헛말이 미끄러져 나오자, 영이가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이, 학교 공부를 누가 재미있어 해요? 시험치고 나면 다 잊어버려요” 한다. “왜 재미가 없지?” 이쯤 되면, 거의 고문수준으로 묻는 건데, 주야가 진지하게, “똑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똑 같이 획일적으로 가르치잖아요. 똑 같은 사람이 되는 거 같아요.”한다.

‘학교는 사람을 체계적으로 노예로 만든다’는 이반 일리치의 말을 호야가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해, 잠시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는데... 갑자기 혁이, “학교에 다닌다 해서 모두 노예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다. 그 말에 나의 눈이 갑자기 ‘확’하게 트인다. 그래 맞아! 누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해서, 우리 모두가 노예가 되는 건 아니지!

교수들이 ‘혼용무도’란 말을 작년 한 해 사자성어로 정했다. 헬조선, 00충, 노답, N포 세대, 이제 뭐 더 나쁜 말을 찾기도 힘들다. 이런 말들이 넘쳐나는 한국사회를 ‘혼용무도’라 표현하는데, 저절로 한숨을 쉬며 공감할 뻔했다. 혁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혁이 말마따나 혼용무도한 사회라 해서 우리 모두가 도를 잃는 것은 아닐 터, ‘처지를 운명으로 여기는 숙명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래서?’ 하고 되물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지금 사회를 ‘얇은 얼음판 위로 스케이트 타는 것’에 비유하며, 그런 처지에서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빠르게 달리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는 ‘연약한 개인들’에게 제안한다. 얇은 얼음판 위에서 빠르게 달리는 ‘처지’를 ‘숙명’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말이다. 잠시 멈춰 숨을 돌리며, 처지와 숙명 사이의 간격을 생각할 시간을, 처지에서 숙명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사유의 시간을 제안한다.

혼용무도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혼용무도한 사회에 빠지지 않는 길일 터.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혼용무도한 사회에서 정신 차리며 살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이럴 땐 다른 왕도가 없다. ‘스승’을 만드는 것!

주야가 또 다시 이반 일리치 말을 인용하며 말한다. “학교에는 시스템만 있을 뿐, 스승은 없다!” 아니다. 스승은 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왜냐하면 배움이 일어나는 것은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울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배움의 주체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승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나만의 스승을 만드는 거! 그리고 스승은 누구나 무엇이나 될 수 있다. 바로 옆의 친구나 이웃, 아이들, 학교 선생님, 심지어 길가의 돌맹이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아니, 내가 스승으로 만들 수 있다. 단, 그 누군가가 ‘내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그 누군가는 내게 스승이 될 수 있고 그 누군가가 ‘내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지?’를 생각할 때만 내게 배움이 일어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옆에 있어도, 내가 그 사람을 스승으로 만들지 않는 한 어떤 배움도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혼용무도한 사회, 어쩌면 이 자체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스승인지도 모른다. 처지를 숙명으로 여기는 오해에 빠지지 않도록 이 질문부터 던지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도대체 이 혼용무도한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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