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미의 철학에세이] “진실-말하기”의 어려움에 관하여

최수미 / 기사승인 : 2016-03-23 17: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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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거짓말했다.” 친구의 자기 고백이다. 친구는 동료가 누군가와 크게 논쟁하고 화가 잔뜩 난 모습을 보고, ‘너 생각에 일리가 없고, 상대방 논리에 더 공감 간다’는 얘기를 감히 못 했단다.
“왜? 배려야 아니면 두려움이야?”
“두려움이야.” 잠시 생각하더니,
“바른말 해봐야 소용없을 거 같아서, 변하지 않을 거 같거든.”
“무기력?”
“응, 관계의 무기력 같은 거…”

철학미네르바

친구를 만나기 바로 전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이와 비슷한 호소를 들었다. 앞에서 좋은 말만 하고,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사는 게 허전하다 했다. 진실-말하기(파레지아parrhesia)는 정치적 실천에서의 진실 말하기와 별개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삶에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는 언어 윤리이다(푸코). 그러므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빈곤하다면, 인간관계가 무기력하고 허전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관계가 어려워질까 봐 진실-말하기를 꺼린다.

‘진실-말하기’는 왜 어려운 걸까? ‘진실-말하기’가 왜 상대방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힘들게 하며, 관계를 불편하게 할까? 푸코의 말을 빌리면, ‘진실-말하기’는 듣는 자의 존재양식을 흔들기 때문이다. 듣는 이가 ‘그 자신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알게끔 폭로’하며, 이러한 폭로로 인한 ‘진실 효과 즉 진실의 상처로 인해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결속은 항상 깨질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말하기’를 피하자니 관계에 생기를 잃고, 진실을 말하자니 관계가 깨질 위기에 처할 수 있는 딜레마. 이 딜레마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우선 오해를 피하자. 진실-말하기는 ‘막말하기,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기’와는 상관없다. ‘듣는 자의 상태를 고려해서, 영혼의 씨앗들이 발아될 수 있도록’ 그래서 가능하다면 ‘진실에의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서로의 영혼이 소통함으로써 즐겁고 유쾌해지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이게 가능하려면, 우리는 상대를 오래도록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볼 수 있을 때, 그리고 잘못된 소통으로 인한 불편함에 대해 자기 성찰하면서 자기 단련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는 자가 그 진실을 삶 속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게 말할 수 있는 권리와 가능성을 부여한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말한 바를 행한다고 약속하는 것이다(푸코). 이 또한 쉽지 않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 수행이 없다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여기서 장일순 선생님의 힘을 빌리자(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주먹으로 후려치면서 깨달음의 희열을 경험할 수 있는 근원에는 ‘섬김’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말하기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섬기기 위한 ‘진실-말하기’일 때, 관계의 불편함이 아닌 관계의 성숙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쉽지 않지만, 최소한 이 정도는 시도할 수 있을 거 같다. 누군가에게 ‘진실-말하기’에 앞서, 내 마음자리에 뭐가 있는지 살펴볼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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