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술의 역사기행] 천전리 각석 명문이 새겨질 당시의 신라

김문술 / 기사승인 : 2016-04-06 15: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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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 명문이 새겨질 당시 신라는 법흥왕. 진흥왕 때다. 삼국 가운데 가장 뒤쳐져 있었던 신라가 법흥, 진흥왕 때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이 마련된다. 이 시기 신라는 활동 무대를 경상도 지역에서 벗어나 한반도로 크게 넓혀나갔을 뿐 아니라 중국과도 직접 교류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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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름이나 지명도 옛날부터 사용해오던 신라 고유의 표기와 한자식 표기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법흥왕을 무즉지태왕, 진흥왕을 심맥부지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무즉지태·심맥부지는 신라 고유의 이름 표기이고, 법흥·진흥은 한자식 표기다. 태종무열왕 이후는 최고위 지배층에서 신라 고유 이름 표기법은 종적을 감추고 한문식 이름만 나타난다.

법흥왕 때는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고 금관가야를 정복하는 등 왕권이 크게 강화된 시기이다. 따라서 왕의 호칭도 모즉지매금왕에서 무즉지태왕으로 바뀐다. 무즉지태왕이라는 호칭이 왕권이 훨씬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지몰시혜비, 부걸지비, 심맥부지 세 사람이 나란히 천전리를 찾았다고 한다. 이때가 539년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540년에 심맥부지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가 바로 진흥왕으로 당시 7살이었다. 진흥왕이 즉위한 다음 상당 기간 외할머니인 부걸지비(보도부인)와 지몰시혜비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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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이후 직접 정치를 시작하면서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삼국통일의 가장 중요한 기반을 다져놓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화랑도 개편과 한강유역 확보다. 화랑도를 개편하여 삼국통일 전쟁의 용감한 전사들을 양성하였으며, 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중국 당나라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된다. 진흥왕은 재위 기간 동안 신라 영토를 3배로 넓혀 놓게 된다. 539년 심맥부지 즉 진흥왕이 천전리를 찾았을 때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차기 왕으로 결정이 된 기쁨을 이미 고인이 된 남편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곳은 청동기 시대 이후 신라 때까지 중요한 제의 장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족부터 귀족, 화랑, 승려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천전리를 찾고 있다. 이들은 심신 수련, 유람, 소원 성취 기원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천전리 계곡 옆 언덕에는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반고사가 있었다. 신라에서는 전통 신앙의 중심지에 사찰이 세워지게 되는데, 천전리 각석 옆에 반고사가 세워진 것도 이 같은 전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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