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병영(兵營)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 기사승인 : 2018-01-17 1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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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역사기행1

< 병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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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절도사 신응기 선정비>




08역사기행_표



‘병영’은 군인들이 주둔하는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울산에는 좌병영(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과 좌수영(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육군사령부와 해군사령부가 모두 울산에 있었던 셈이다. 그만큼 조선시대 울산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휴전선 최전방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이 같은 병영과 수영의 설치 목적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 후 경상도 좌수영은 1592년(선조 25)에 부산 수영만으로 옮겨가지만 병영은 갑오개혁 때까지 470여 년간 울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각각 병마절도사를 배치하였다. 처음 경상도좌병영 자리로 낙점된 곳은 기박산성이었다. 이곳은 울산시 북구 농소에서 경주시 양남면 상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기박이재 위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박산성에서 성을 쌓던 어느 날 갑자기 사나운 바람이 불어 와 깃발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남으로 날아가 지금의 병영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이곳이 하늘이 정해준 곳이라 여겨 좌병영을 울산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 이래 풍수지리 사상과 산악숭배 사상이 결합되어 가옥, 산소, 성곽 도시, 자연 취락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병영성도 북쪽 장현동의 황방산(黃坊山, 142m)을 주산으로 하고 동천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전체 형태는 ‘人’자 모양의 구릉 사이 계곡을 성안으로 하고, 양쪽 구릉 정상부에 석축을 쌓은 포곡성(包谷城)이다. 성곽은 남북축이 긴 타원형이며, 네 개의 성문과 십자형 가로망을 갖추고 있다.



병영성이 축조될 당시만 해도 울산공설운동장 일대의 넓은 들인 정지말은 바다였으며, 성 동쪽을 흐르는 동천을 통해 북문 아래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이 같은 입지 조건이 병영 설치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전기 국방체제인 진관체제상의 편제(주진-거진-제진)에서 울산에 있었던 경상좌병영의 관할구역은 표와 같다.
이렇게 조선 전기 경상좌도의 군사 중심지였던 병영은 임진왜란 때 헐리고 말았다. 일본군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허물어 울산왜성(도산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병마절도사 신응기 선정비가 도산성 꼭대기에 있는 본환 동문지 확돌로 사용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병마절도사 선정비는 당연히 병영에 있었을 것이다. 그 비석이 도산성의 출입문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확돌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산성을 축조할 때 병영성의 성벽과 함께 비석들도 함께 옮겨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지금의 병영성은 왜란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다. 성벽 길이가 2.6km, 높이는 3.7m정도 된다. 1859년(철종 10)에는 병사 이원희가 남문 밖으로 성을 쌓아 성 밖에 있던 시장, 연못, 정자 등을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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