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포 영성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 기사승인 : 2018-07-25 17:5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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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
개운포영성 ⓒ울산시청
개운포영성 ⓒ울산시청

넓은 바닷가에 위치한 울산은 해산물, 농산물 등 각종 물자가 풍부한 고장이다. 이곳에서 일본까지는 불과 160km로 서울까지 400km의 절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러다 보니 울산은 왜구들의 중요한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울산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영, 수영, 석보, 만호진 등이 세워졌고 해안가에는 줄지어 봉수대를 설치하는 등 여러 군사 시설들이 마련되었다.



이같은 군사시설들을 총괄하고 통제했던 병영과 수영 두 곳 모두 울산에 몰려있었다.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 지역 육군사령부가 좌병영이라면, 해군사령부는 좌수영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 즉 낙동강 동쪽지역 육군사령부와 해군사령부가 모두 울산에 있었던 셈이다. 이같은 사실은 울산에 왜구의 침략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남구 성암동 외황강과 처용암이 만나는 곳에 있는 개운포영성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수영)이었다. 근처에는 처용암이 있으며, 세죽 조개무지 성암동 패총 등 유적이 풍부한 곳이다. 1459년(세조 5) 동래 부산포에 있었던 수영이 개운포로 옮겨왔다가, 1592년(선조 25) 밀려 쌓인 모래 때문에 뱃길이 막혀 다시 동래 부산포로 옮겨질 때까지 이곳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이었다.



개운포영성은 해발 50m 정도의 남쪽 경사면과 구릉이 이어지는 곳에 축조된 평산성(平山城)이며, 성안에 골짜기가 있는 포곡성(抱谷城)이기도 하다. 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며 구릉의 흐름을 적절히 활용하여 구릉과 평지에 축조되었다.



수영이 부산으로 옮겨지고 400년이 넘은 지금 성곽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성문(城門), 치성(雉城), 해자(垓字), 옹성(甕城), 건물 흔적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성벽(城壁)은 땅을 판 다음 납작한 돌을 깔고, 그 위에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끝에서 20cm정도 안쪽으로 들여서 기단석과 성벽돌로 잔돌을 끼워가며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외축내탁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평지는 약 220cm이며, 북쪽과 동쪽의 구릉부분은 평지보다 낮게 남아있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1280m정도이다. 출입문은 동.서.북쪽에서 확인되며, 남문은 훼손되어 정확한 위치 및 규모는 알 수 없다. 북문은 좌.우의 협곡이 구분되는 구릉에 위치하며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이 갖추어져 있다.



남문지는 서쪽의 외황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주변에서 기와편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누각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훼손이 심하여 남문시설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이곳이 성의 정문이었을 것이다.



치(雉)는 남문과 서문 사이, 북문과 동문 사이, 서문과 북문 사이에 3기가 남아 있다. 구조는 체성 바깥으로 튀어나온 사각 형태에 가깝고, 하단에는 장대석과 인두석 크기의 할석이 축조되어 있다. 해자는 동쪽과 북쪽 체성 바깥에 구축되어 있으며, 양쪽 모두 단면 V자형을 이루고 있다.



1656년(효종 7)에는 학성공원 아래 있던 전선창(戰船廠)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전선창은 전쟁에 쓰이는 선박을 만들거나 배를 정박시키는 곳으로 일명 ‘선소(船所)’라 하였다. 오랫동안 이곳에 전선창이 있었기 때문에 성안 마을이 철거되기 이전까지 이곳을 ‘선수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 전선창은 1895년 수군이 해산할 때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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